
현재는 '아키노 혁명'이나 '에드사(EDSA) 시민혁명', '피플 파워 혁명' 이라 불리는 무혈혁명 사건으로, 간단히 말해서 1965년 당선된 제6대 대통령 마르코스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필리핀 상원의원 아키노를 암살하는 등 온갖 부정행위로 21년에 걸친 독재정치를 펼치자 1986년 2월 그에 반발한 국민들이 저항하여 들고 일어섰고,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내고는 민주화를 이룩한 사건입니다.
현재도 필리핀은 매년 2월 25일을 혁명기념일로 제정하여 축제를 벌인다고 합니다.
그럼 문제는 다음입니다. 이 민주화 혁명과 볼테스 V는 대체 무슨 관계인가?

초전자머신 볼테스 V(V는 파이브라고 읽음)는 일본의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의 작품으로 초전자로보 콤바트라 V, 투장 다이모스와 함께 일명 나가하마 낭만로봇 3부작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인데, 이 시리즈의 기존 로봇 애니메이션과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면 드라마적인 면, 스토리 텔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 있습니다.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은 그냥 우리편 착한 놈이 나쁜 놈 때려잡는다는 식의 간단한 구조로 모든 게 설명이 가능했지만 이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스토리텔링, 심지어 적들까지도 단순히 나쁜놈들이 아니라 싸워야 할 명백한 이유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지금이야 그런게 당연한 취급 받지만, 이때는 대단한 거였습니다)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볼테스 V의 스토리는 대략 보아잔이라는 별이 있는데, 그 별에서는 뿔이 있는 유각(有角)인과 뿔이 없는 인간 두 가지의 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뿔이 있는 유각인들은 뿔이 없는 인간들을 차별하며 자기들끼리만 놉니다. 이때 보아잔의 지도자가 될 후보로 라 고르(지구에서 쓴 이름은 고우 켄타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라 고르는 좋은 지도자가 될 인물이긴 하나 사실 뿔이 없는 인간이면서 가짜 뿔을 달아 뿔이 있는 행세를 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잔 바질이라는 자가 라 고르의 뿔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독재정치를 펼치게 되고, 라 고르는 잔 바질이 보내는 암살자들을 피해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지구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잔 바질은 라 고르를 쫓아 지구 침공부대와 사령관인 프린스 하이넬을 보내게 되고, 지구에서는 고우 켄타로라는 이름을 쓰며 장남 고우 켄이치,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동료들이 볼테스 V를 이용하여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는 볼테스 V가 보아잔 본성으로 치고 들어가는데, 이때 보아잔에서는 독재자를 몰아내려는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결국 최종화에서 독재자 잔 바질은 축출되고 보아잔과 지구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됩니다. 중간에 지구침공 사령관 하이넬이 사실은 고우 켄이치와 배다른 형제였다는 반전도 나오긴 합니다만 이건 뭐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당장 이 이야기에 중요한 건 아닙니다.
스토리적으로 프랑스 근대사적인 내용이 함유되어 있고, 보아잔의 복식이나 문화 등 역시 프랑스적입니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라인은 프랑스 혁명에 로봇이 들어간 정도가 되겠습니다. 어쨌건 민중이 일어나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독재자를 때려잡는다는 건 일맥상통 하니까요. 참고로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은 나중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인 '베르사유의 장미'의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볼테스 V의 스토리라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결국 마지막에는 민중들이 독재정치를 하는 지도자를 몰아낸다는 걸로 결말이 납니다. 그리고 1978년 당시 필리핀의 상황은? 역시 민중의 고혈을 짜는 독재자가 민중들의 머리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필리핀의 현 상황과 완전히 일치해버리는 겁니다. 결국 이걸 보다보니까 이거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필리핀 정부는 최종화 바로 직전에 볼테스 V의 방송을 강제로 중단해 버립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폭력적이라는 것과(로봇애니메이션의 만년떡밥입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를 보고도 반성을 못했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의 문화침략에 대항해야 한다 라는 이유였습니다. 문제는 그래도 볼테스 V를 제외한 다른 애니메이션들은 잘만 방영해 줬다고 합니다. 역시 문제는 스토리였던 겁니다.
결국 1986년 혁명 사건이 터지고 나서 독재자 마르코스는 물러납니다. 그리고 독재자를 쫓아낸 다음 필리핀 민중들이 한 일은 뭐였을까요? 네, 볼테스 V 마지막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독재자를 몰아낸 필리핀 민중들은 마찬가지로 독재자를 몰아낸 보아잔 민중들을 보며 환호했고 독재자가 사라진 지구와 보아잔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하나가 국가적인 현상으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국가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어떤 필리핀 기자가 쓴 글(원문으로 보기)의 한 구절을 보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을 교육적으로 줄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애들이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나는 TV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볼테스 V를 보여주며 설명할 지도 모른다. 절대 우스운 이야기는 없지만, 현대 필리핀 역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다. 더 나아가면, 그건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이기도 하고 현재의 내가 있도록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혹시 모른다, 볼테스 팀이 그렇게 외쳤던 "렛츠 볼트 인!(볼테스 V의 합체 구호)" 은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을 모두에게 불어넣어 주었을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