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함!

by 강화인간
필리핀의 민주화 혁명과 초전자머신 볼테스 V
한국과 마찬가지로, 필리핀 역시 근대화를 겪으며 일본의 식민지배와 해방 후에도 독재정치로 인한 민주주의의 몰락 등 여러가지 위기를 겪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역시 위기들을 헤쳐나가며 성장한 나라인데, 한국으로 치면 5.18 민주화 항쟁에 비견할만한 한 사건이 있습니다.

현재는 '아키노 혁명'이나 '에드사(EDSA) 시민혁명', '피플 파워 혁명' 이라 불리는 무혈혁명 사건으로, 간단히 말해서 1965년 당선된 제6대 대통령 마르코스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필리핀 상원의원 아키노를 암살하는 등 온갖 부정행위로 21년에 걸친 독재정치를 펼치자 1986년 2월 그에 반발한 국민들이 저항하여 들고 일어섰고,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내고는 민주화를 이룩한 사건입니다.

현재도 필리핀은 매년 2월 25일을 혁명기념일로 제정하여 축제를 벌인다고 합니다.
그럼 문제는 다음입니다. 이 민주화 혁명과 볼테스 V는 대체 무슨 관계인가?

 

초전자머신 볼테스 V(V는 파이브라고 읽음)는 일본의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의 작품으로 초전자로보 콤바트라 V, 투장 다이모스와 함께 일명 나가하마 낭만로봇 3부작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인데, 이 시리즈의 기존 로봇 애니메이션과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면 드라마적인 면, 스토리 텔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 있습니다.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은 그냥 우리편 착한 놈이 나쁜 놈 때려잡는다는 식의 간단한 구조로 모든 게 설명이 가능했지만 이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스토리텔링, 심지어 적들까지도 단순히 나쁜놈들이 아니라 싸워야 할 명백한 이유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지금이야 그런게 당연한 취급 받지만, 이때는 대단한 거였습니다)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볼테스 V의 스토리는 대략 보아잔이라는 별이 있는데, 그 별에서는 뿔이 있는 유각(有角)인과 뿔이 없는 인간 두 가지의 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뿔이 있는 유각인들은 뿔이 없는 인간들을 차별하며 자기들끼리만 놉니다. 이때 보아잔의 지도자가 될 후보로 라 고르(지구에서 쓴 이름은 고우 켄타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라 고르는 좋은 지도자가 될 인물이긴 하나 사실 뿔이 없는 인간이면서 가짜 뿔을 달아 뿔이 있는 행세를 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잔 바질이라는 자가 라 고르의 뿔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독재정치를 펼치게 되고, 라 고르는 잔 바질이 보내는 암살자들을 피해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지구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잔 바질은 라 고르를 쫓아 지구 침공부대와 사령관인 프린스 하이넬을 보내게 되고, 지구에서는 고우 켄타로라는 이름을 쓰며 장남 고우 켄이치,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동료들이 볼테스 V를 이용하여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는 볼테스 V가 보아잔 본성으로 치고 들어가는데, 이때 보아잔에서는 독재자를 몰아내려는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결국 최종화에서 독재자 잔 바질은 축출되고 보아잔과 지구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됩니다. 중간에 지구침공 사령관 하이넬이 사실은 고우 켄이치와 배다른 형제였다는 반전도 나오긴 합니다만 이건 뭐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당장 이 이야기에 중요한 건 아닙니다.

스토리적으로 프랑스 근대사적인 내용이 함유되어 있고, 보아잔의 복식이나 문화 등 역시 프랑스적입니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라인은 프랑스 혁명에 로봇이 들어간 정도가 되겠습니다. 어쨌건 민중이 일어나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독재자를 때려잡는다는 건 일맥상통 하니까요. 참고로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은 나중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인 '베르사유의 장미'의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볼테스 V가 필리핀에서 방영된 건 1978년 들어서입니다. 당시 필리핀에는 이렇다 할 로봇이 나오는 만화도 없었고 독재상황에서 오락거리나 볼거리도 거의 없었던지라 볼테스 V의 등장은 꽤나 충격적이었고, 곧바로 국민 애니메이션으로 급부상합니다. 최대 시청률은 58%. 물론 프랑스에 수출된 그랜다이저가 기록한 전설의 시청률 100%의 장벽은 깨지 못했지만 어쨌건 58%면 거의 그 시간 TV보던 국민 절반은 볼테스 V를 봤다는 소리가 됩니다. 문제는 여깁니다.

볼테스 V의 스토리라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결국 마지막에는 민중들이 독재정치를 하는 지도자를 몰아낸다는 걸로 결말이 납니다. 그리고 1978년 당시 필리핀의 상황은? 역시 민중의 고혈을 짜는 독재자가 민중들의 머리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필리핀의 현 상황과 완전히 일치해버리는 겁니다. 결국 이걸 보다보니까 이거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필리핀 정부는 최종화 바로 직전에 볼테스 V의 방송을 강제로 중단해 버립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폭력적이라는 것과(로봇애니메이션의 만년떡밥입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를 보고도 반성을 못했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의 문화침략에 대항해야 한다 라는 이유였습니다. 문제는 그래도 볼테스 V를 제외한 다른 애니메이션들은 잘만 방영해 줬다고 합니다. 역시 문제는 스토리였던 겁니다.

결국 1986년 혁명 사건이 터지고 나서 독재자 마르코스는 물러납니다. 그리고 독재자를 쫓아낸 다음 필리핀 민중들이 한 일은 뭐였을까요? 네, 볼테스 V 마지막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독재자를 몰아낸 필리핀 민중들은 마찬가지로 독재자를 몰아낸 보아잔 민중들을 보며 환호했고 독재자가 사라진 지구와 보아잔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이런 연유로 초전자머신 볼테스 V는 필리핀 민주화의 이정표 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1999년 볼테스 V를 재방영 했는데, 이때도 평균시청률 40% 정도의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합니다. 어떤 식품회사는 볼테스 V를 이용한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고, 미확인 정보지만 군대 행진곡으로 볼테스 V의 오프닝 테마를 사용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볼테스 V의 오프닝을 불렀던 가수 호리에 미츠코가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는 국빈급 대우를 하기도 했고, 일본의 아베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는 공항에서 젊은이들이 볼테스 V의 엔딩곡 '아버지를 그리며'를 부르며 환영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하나가 국가적인 현상으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국가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어떤 필리핀 기자가 쓴 글(원문으로 보기)의 한 구절을 보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을 교육적으로 줄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애들이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나는 TV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볼테스 V를 보여주며 설명할 지도 모른다. 절대 우스운 이야기는 없지만, 현대 필리핀 역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다. 더 나아가면, 그건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이기도 하고 현재의 내가 있도록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혹시 모른다, 볼테스 팀이 그렇게 외쳤던 "렛츠 볼트 인!(볼테스 V의 합체 구호)" 은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을 모두에게 불어넣어 주었을 지도.
by 강화인간 | 2009/04/29 16:16 | 카테고리F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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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라욘하트 at 2009/04/29 17:16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팬입니다. 힛갤...이 아니고 이오공감으로 좀 가시죠.
Commented by 레여 at 2009/04/29 17:47
아아 좋은 만화다...
Commented by gg at 2009/04/29 17:57
국민 절반이 아니라 tv 보는 국민의 절반이겠지.
Commented by Merkyzedek at 2009/04/29 17:58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Commented by 액시움 at 2009/04/29 17:58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고전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할 수도 있군요.;
Commented by 나야꼴통 at 2009/04/29 18:30
전 개인적으로 콤바트라 는 볼테스 보다 좋아하지만..
그랜다이져 의 100% 는 처음알게된 사실이군요.

우리나라 의 5공때도 공상과학만화 의 암흑기 였는데. 그 생각이 나는군요.ㅡㅡ;;
Commented by a at 2009/04/29 18:37
우왕ㅋ 입좌파로서 참고하겠뜸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04/29 18:44
일본 인터넷에서 그렇게 알려져 있을뿐 볼테스V가 혁명에 연관되어 있다는 건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필리핀에서 볼테스V가 인기가 높았던 건 사실이고 독재정권에 의해 방송금지된 건 맞는데 혁명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사람은 필리핀에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방영된 필리핀제 볼테스V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도 혁명 얘기는 전혀 안 했고, 오히려 어른들은 볼테스V를 싫어했고 볼테스V의 방영금지를 찬성하는 여론이 강했다는 걸 알려주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애들이 폭력적인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공부를 안 하고 장난감 사달라고 난리였거든요.
혁명 이후 방송이 재개되었을 때도 열광적인 붐은 없었습니다. 7년전 어린시절에 좋아했던 사람들은 열심히 봤지만, 전체 민중이 그걸 보면서 환호했다는 건 지나친 오버입니다.

"필리핀 민주화의 이정표" 같은 건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일본애니메이션을 갖고 자화자찬하기 위해 부풀려진 루머입니다. 아마 오카타 토시오가 자기 책에서 하나의 추측으로서 언급한 게 처음인데 그게 어느새 정설로 퍼져버린 것입니다.
Commented by R쟈쟈 at 2009/04/29 18:47
약간 쫏코미를 넣자면 아이들을 데리고 지구로 간것이 아니고, 뿔이없음이 탄로나서 임신한 아내와 생이별을 한후 감옥에 들어갔다가 저항파에 의해 탈출한후 저항운동을 하다 지구로 망명해서 미츠요박사를 만나 세아이를 낳았지요^^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알게되었네요....
Commented by Lay_N at 2009/04/29 20:31
분명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겠으나, 호리에 미츠코씨의 국빈급 대접이라던가 2006년 아베 총리의 방문때 볼테스V의 엔딩으로 환영해주었다던가 하는 점(일본 위키피디아)을 볼 때 100% 뻥은 아니지요. 최종화 직전에 방영을 중지한 것도 사실이고.

뭐, 이래저래 흥미로운 이야기인건 사실입니다. :)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4/29 20:35
볼테스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하청을 맡긴 최초 작품으로서도 의미가 있지요.
Commented by gmmk11 at 2009/04/29 21:16
독재정권은 국영영상사업소에 마지막화를 만들게 해서


혁명은 실패하고 남자는 다 죽고 여자는 포로로 잡히는 엔딩으로....
Commented by 라세엄마 at 2009/04/30 18:00
그리고 그 뒤는 동인 작가가 그리는 거죠? 'ㅅ'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04/29 22:22
잘 읽고 갑니다. 메칸더 V가 왠지 더 보고 싶어지는 느낌이 ㄷㄷ
Commented by 다스위자드 at 2009/04/30 17:49
정말 재밌는 이야기네요.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라세엄마 at 2009/04/30 18:00
그렌다이저 100%는 전설이네요 'ㅅ';;;;;;;;;
Commented by 하이염 at 2009/05/03 21:36
계양구 ,김포쪽 사시던 재원이형 맞나요 ㅋㅋㅋ
맞으면

010 2029 0978 여기로 문자좀 주세요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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